2026년 목회서신
2026년 3월 8일 <하나님의 임재의 연습>
왜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셔서 목마름을 경험하게 하셨을까요? 물이 없는 광야는 하나님의 임재와 신실하심을 경험할 수 있는 곳입니다. 물이 없는 광야는 하나님을 향한 나의 믿음을 시험하는 곳이며 나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하는 곳입니다. 물이 없는 광야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물이 없는 광야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곳이며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로렌스 형제(Brother Lawrence)는 17세기 프랑스의 수도사였습니다. 그의 편지들과 가르침들을 모은 책 “하나님의 임재의 연습(The 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이라는 기독교 고전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로렌스는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했나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I renounced, for the love of Him, everything that was not He; and I began to live as if there was none but He and I in the world.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오직 하나님과 나 둘만 있는 것처럼 살기 시작했습니다.”
로렌스 형제의 말에 비추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겪었던 물이 없는 상황은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이 없는 광야로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자기 백성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항상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심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의 사랑 안에 거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광야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심은 세상의 죄악된 물을 마시지 말고 반석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으로부터 솟아나는 생명의 물을 마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며 우리의 영혼을 만족하게 하는 신령한 물을 주십니다. 고난의 때 반석이신 예수님이 우리와 항상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시기를 바랍니다. 임마누엘 예수님과 항상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2026년 3월 1일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
소설가 김성일은 그의 소설 <아브라함>의 서문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그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잘 살고 있던 곳에서 떠나 늘 자리를 옮겨 다닌 떠돌이었고, 그의 아름다운 아내를 빼앗으려는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까봐서 자신의 아내를 아내라 하지 못하고 누이라 했던 겁쟁이였으며, 그 아내가 여종에게로 들어가서 자라고 하면 그렇게 하고 다시 그녀를 내쫓으라고 하면 그 말대로 내쫓는 공처가였다. 그는 또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잡아서 번제로 드리라고 하니까 아무런 항의도 없이 자기 아들을 잡으려고 칼을 들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보면 그는 도무지 자기주장도 없고 생각도 없는 바보 같은 남자였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늘 그를 따라 다니면서 그에게 땅을 주고 복을 준다는 약속을 거듭하셨고, 그의 이름은 본래 ‘아브람’이었으나 그의 나이 99세 때에 만민의 아비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꿔주셨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는 만민의 아비가 되었다. 지금 아랍 사람들과 전세계 이슬람교도들과 유대인들은 그를 자기들의 조상이라 주장하고 있으며 카톨릭 교도와 개신교 신자들이 모두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떠받들고 있다. 세계인구의 거의 절반도 넘는 사람들이 다 그를 조상으로 여기고 있으니 하나님이 그에게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보다도 많게 하리라던 그 약속은 성취된 셈이다.” 처음부터 믿음이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다 보니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그분의 뜻을 알게 되니 더욱 진실하게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넘어지고 실패합니다. 우리는 실패와 넘어짐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은 계속 성장하고 성숙해집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떻게 성장했습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이 흔들리고 약해질 때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셨고 말씀해주셨고 힘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지속적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그의 믿음이 성장하고 온전해진 것입니다. 우리들도 사는게 힘들고 믿음이 약해질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위로해주시고 힘이 되어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을 찾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한 일은 전혀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약속을 믿었으며 말씀에 순종하는 결단과 행동을 했습니다. 믿음은 순종이요 믿음은 행함입니다. 의심과 회의가 밀려오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결단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을 멈추면 안 됩니다.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자라고 온전한 믿음이 됩니다.
2026년 2월 22일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햇빛 따사로운 들녘에 시샘의 바람 불고
선악의 열매 소담스레 익어갈 때
한 마리 화사한 꽃뱀이 풀섶에 숨어 속삭이네
‘저 먹음직한 열매를 보아라, 얼마나 탐스러운가 그대가 지혜로와지기 원한다면 열매를 따게나’
붉은 입술에 넘치는 달콤한 유혹이
호기심에 불을 당기고 향긋한 내음 코 끝에 스쳐
하늘 높이 거친 손 휘두르며 금단의 가지 꺾어 열매를 취했네
쓰디쓴 맛에 놀라 환히 트인 눈이여!
순간 벌거벗은 알몸이 부끄러워
무화과 큰 잎으로 앞자락을 가리고
동산 우거진 나무 숲에 몸을 숨기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악몽에 시달리듯 천 길 벼랑 헛딛어
바닥없는 늪 속으로 가라앉아 탄식하네
가시덤불 엉겅퀴 얽힌 땅엔 피와 땀 스며들고
꽃뱀의 이빨 번뜩이는 돌길 가시밭 험한 길을 정처 없이
유리(遊離)하는 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네
흙으로 난 몸이 흙으로 갈 때까지 (남상학의 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용서하고 구원과 영생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救贖 redemption)의 은총이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실락원이 생명나무의 열매가 항상 열리고 그 잎사귀들이 만국을 치료하는 복락원이 되게 하십니다(계 22:2).
2026년 2월 15일 <예수님의 변화산의 변모의 의미>
예수님께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제자들의 눈 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예수님의 용모가 영광스럽게 변모되었습니다. 주님의 본래의 신적인 영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곳에 모세와 엘리아도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장차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이란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눅 9:31). ‘별세’란 말은 헬라어로 ἔξοδος(exodos)인데 ‘나가다(탈출)’, ‘세상을 떠나다’는 뜻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만민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떠나실 것인가? 예수님이 어떻게 죽으실 것인가?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능력이 많으시고 지혜가 뛰어나신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어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믿었는데 이제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혼란스럽고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이미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예수님과 구약의 두 선지자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이를 통한 구원에 대해 말하고 있을 때 구름이 그곳을 덮었습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성부 하나님이 아들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시기를 “이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 17:5)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직접 증언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말을 들었고 선지자 엘리야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말씀만 들으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최고의 진리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직접 증언은 완벽하고 완전한 확증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아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구약의 모든 언약의 성취인 것을 확증하십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졌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대표하는 구약의 율법(율법서)과 엘리야 선지자가 대표하는 선지자들의 예언(선지서)을 완성하셨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만민을 구원할 그리스도 메시야 구주이십니다. 아멘.
2026년 2월 8일 <소금 같은 사람>
아무리 귀한 재료를 가지고 음식을 만들어도 소금이 들어가지 않으면 맛이 없습니다. 밋밋한 음식에 소금이 들어가는 순간 음식 맛이 살아납니다. 소금 자체가 음식이 되지는 못합니다. 소금이 음식 재료 속에 녹아 들어갈 때 맛을 냅니다. 소금이 음식에 들어간 것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소금이 맛을 냈지만 누구도 소금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소금은 주인공이 아닙니다. 소금은 주인공을 띄워주고 사라지는 조연입니다. 소금은 음식이 썩는 것을 방지합니다. 음식을 상하지 않게 오래 보관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오래 두고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관을 위해 얼리기도 하고 말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간단히 오래 저장할 수 있는 방법은 소금으로 절이는 것입니다. 소금에 절이면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합니다. 바닷물은 썩지 않습니다. 바닷물 속에 3.5%의 소금이 있기 때문입니다. 불과 3.5%의 소금(나트륨)이 큰 바다를 썩지 않게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금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소금 같은 사람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상관없는 사람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고 자기 희생적인 사람입니다. 소금은 물에 자신을 녹입니다. 소금 같은 사람은 자신을 버리고 낮추고 겸손하며 다른 사람을 높이고 빛나게 해주는 헌신적인 사람입니다. 소금 같은 사람은 메마르고 싱거운 세상에서 살 맛을 내는 사람입니다. 소금 같은 사람은 변하지 않는 성품을 지니며 묵묵하게 자신의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신뢰를 얻는 사람입니다. 소금 같은 사람은 쉽게 실증나는 일시적인 존재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도 가치와 신뢰가 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소금과 같은 존재입니다. 소금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소금은 없으면 안되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소금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맛을 내기를 원합니다. 보이지 않지만 살 맛을 내는 소금이기를 원합니다. 오늘 소금처럼 드러내지 않고 맛을 내는 하루가 되기를 원합니다.
2026년 2월 1일 <예수님의 행복론>
예수님의 산상수훈 가운데 팔복(八福 The Beatitudes 마 5:3-12)이 가장 먼저 나옵니다. 8복은 산상수훈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팔복에서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이 복 있은 사람들인지 말씀하십니다. 과연 누가 참된 복을 받은 사람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긍휼히 여기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화평하게 하는 사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돈을 최고로 아는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을 깊이 생각해 본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이 맞습니다!”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행복에 관한 예수님 설교의 핵심은 ‘천국’입니다. 예수님의 행복론은 천국으로 시작해서 천국으로 끝납니다. 8복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그리고 마지막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로 끝납니다. 천국을 소유한 자가 복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천국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시기 위함입니다.
넓게는 산상수훈, 좁게는 8복은 예수님의 생애와 사상을 무한대로 축소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말로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가르치신대로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가르침을 자신의 실제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팔복,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시면서, 이것이 참된 행복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팔복의 핵심 주제는 ‘기쁨’입니다. 12절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환경과 처지, 형편을 뛰어넘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샘솟듯 솟아나는 기쁨은 영원히 변치 않는 참된 복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팔복은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합니다.
2026년 1월 18일 <그리스도인의 열심>
파스칼은 말하기를 “사람에게는 두 가지 큰 죄악이 있다. 그것은 교만과 게으름이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사람의 본질적인 욕망은 게으름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게으름을 저항하면서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표현이 성경 여러 곳에 나옵니다(왕하19:31, 사9:7, 고후11:2). 하나님의 열심은 인간 구원을 위해 보이신 하나님의 거룩한 열정을 의미합니다(민25:11). 예수님께서도 열심이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신실하고 열정적으로 아버지의 일을 하시다가 너무 피곤하셔서 풍랑이 이는 배 안에서도 주무셨습니다(마 8:24).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열심은 그리스도인의 기본입니다. 다만 어떤 열심이냐가 문제입니다. 주님은 헛되거나 무익한 일에 열심을 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헛되고 무익한 일들에 열심을 냅니다. 우리가 자기의 만족만을 위한 열심을 내면 누구에게도 유익을 끼치지 못하는 헛된 일로 인생을 낭비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열심을 내고 있는가? 우리가 열심을 내고 있는 일은 진정 가치 있는 일인가? 자신에게 끊임없이 물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열심이 과연 주를 위한 열심인지,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인지 때로는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판별 기준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나의 열심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인가, 아니면 나의 육신적인 욕심이 넘쳐서 열심을 내는 것인가를 살펴보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를 향한 사랑과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게으름을 용납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은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懈怠)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잠 19:15)고 했고,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살후 3:10). 그리스도인은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열심히 일하라고 달란트와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말씀과 기도와 전도와 봉사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게으름과 낭비가 없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한 것처럼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며”(롬 12:11)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열심, 그리스도의 열심을 닮아 우리들도 열심을 냅시다.
2026년 1월 11일 <사랑은 모든 것의 시작이고 모든 것의 완성>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라디아서 5:22-23). 이 구절은 흔히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데 신약성경 원어인 헬라어로보면 열매는 하나입니다. 열매라는 단어를 단수형으로 표현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아홉 가지가 아니라 한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는 바로 사랑입니다. 성령을 받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사랑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사랑으로 시작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에 관한 책 <Life on the Vine>을 쓴 필립 케네슨(Philip Kenneson)은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나머지 여덟 가지는 사랑이라는 빛으로부터 파생된 색깔이라고 합니다. 마치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 여러 가지 색깔로 나타나는 것처럼,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라는 빛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러 색깔이 모여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아름다운 사랑의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시작이고 모든 것의 완성입니다.
사랑이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 즉, 사랑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 자신의 생명까지 십자가에 내어주는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크고 높고 넓고 깊은 사랑을 만난 사람은 변화됩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로마서 5장 5절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셔서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변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그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교회의 부흥은 단순히 교인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흥은 사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신앙의 뿌리를 내리고 예수님을 닮은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 진정한 부흥입니다. 우리 교회가 성령의 열매 맺는 아름다운 교회, 사랑이란 성령의 열매 맺는 아름다운 우리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026년 1월 4일 <성령의 열매 맺는 아름다운 교회>
2026년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새로운 시작입니다. 새해를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는 것은 항상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화가가 하얀 캔버스 앞에서 상상력을 발휘하여 어느 쪽으로 붓을 시작할까 하는 설레임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새해에는 어떤 그림을 그릴까요? 아마도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그림은 내가 생각해 낸 것보다 성령의 감동과 지시로 그려지는 주님의 교회의 영광된 모습일 것입니다.
새해에는 우리 교회의 캔버스 위에 하나님의 그림이 아름답게 그려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주님의 교회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주님의 은혜와 성도들의 믿음과 순종이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지길 기대합니다. 하나님이 성령의 역사로 붓을 움직이실 것을 기도합니다. 우리 또한 주님과 호흡을 맞추어 믿음과 순종의 붓을 열심히 움직여야 하겠습니다. 그림은 주님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그리실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 맺는 아름다운 교회 (A Beautiful Church Bearing the Fruit of the Spirit)’가 우리가 금년 한해 동안 바라보고 나아갈 목표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가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갈 5:22-23)의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새로운 목표를 바라보고 나아갑시다.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지길 원하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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