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목회서신
2025년 2월 23일 <성경적인 땅의 의미>
땅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거룩한 삶의 장소입니다. 구약성경에 땅이란 단어가 2,504번 나옵니다. 땅이란 단어는 성서에서 네 번째로 많이 나오는 단어입니다. 땅은 성경의 중요한 주제중의 하나입니다. 땅은 삶과 죽음, 사랑과 전쟁, 갈등과 횡포가 난무하는 삶의 현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역사의 무대가 땅입니다. 구약은 땅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그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믿음의 사람들의 자서전적 기록입니다. 성경은 하늘을 담고 있는 땅의 이야기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땅을 의미하는 용어로는 아다마와 에레츠가 있습니다. 아다마는 붉다는 뜻의 아돔에서 파생된 단어로 붉은 색의 비옥한 땅을 의미합니다. 아다마는 경작이 가능한 땅, 인간이 거주하기에 적합한 땅입니다. 땅이란 또 하나의 단어 에레츠는 비옥한 땅인 아다마와는 달리 땅의 외적인 조건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창조와 우주적 관점에서 본 땅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이 에레츠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은 본래 하나님의 것입니다(출 19:5, 레 25:23).
신명기 11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 얻게 될 가나안 땅은 애굽 땅과 같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애굽은 나일강의 풍부한 물이 있기 때문에 쉽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입니다. 그러나 산과 골짜기로 이루어진 가나안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척박한 땅입니다. 풍부한 물을 가지고 있는 애굽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의존하는 가나안보다 훨씬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애굽은 인간의 노력에 의존하는 인간 중심의 지역인 반면에 가나안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은혜가 있어야 살 수 있는 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 안에서 살 수만 있다면 환경이 힘들어도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우리의 삶의 터전을 하나님께서 보살펴주시고 친히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돌보아주신다면 그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창조자 야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것이 행복의 비밀입니다. 오늘의 삶 속에서 주어진 이 땅의 터전 뿐만 아니라 세상의 종말에 이루어질 영원한 가나안의 축복을 바라보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2025년 2월 16일 <말씀 묵상>
여러분은 아침에 일어나면 무엇부터 하십니까? 아침에 성경 읽고 묵상하는 것보다 뉴스부터 보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뉴스 보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뉴스는 사건과 사고를 전해주기 때문에 뉴스부터 보면 근심 걱정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으므로 성경부터 보면 힘든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를 시작하면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일을 최우선에 두고 먼저 해야 합니다. 묵상이란 ‘성경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을 마음에 두어 생각하는 것’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묵상의 유익함에 대해서 말합니다. “날마다 내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고요히 묵상하는 시간은 내 삶의 질서가 분명해지는 순간이다. 묵상은 평안과 인내와 기쁨의 원천이다. 그것은 우리 삶에서 질서에 공헌하는 모든 힘들을 한데 끌어오는 자석과도 같다. 그것은 깨끗한 표면에 구름과 태양을 비추는 깊은 물과도 같다. 묵상은 또한 우리 삶 속에서 자기 훈련, 침묵, 치유 및 만족의 영역에 지존하신 분을 모심으로써 그분을 섬기는 일이다.”
성경에서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시 1:2)는 ‘복 있는 자’라고 했고,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시 119:2)라고 했습니다. 묵상을 통해서 얻는 유익에 대해서 시편 19편은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 19:7,8). 우리가 주일 설교 듣는 것만으로 한 주간 말씀을 따라 온전하게 살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말씀은 주일뿐만 아니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평일에도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묵상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설교를 들어도 삶이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는 일을 계속하는 가운데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과 삶이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말씀의 달고 오묘한 맛(시 19:10)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 말씀의 깊이를 날마다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5년 2월 9일 <은혜>
어떤 사람이 죽어서 천국문 앞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나와서 말했습니다. “이 문에 들어가려면 일생동안 살아 온 것을 점수로 환산해서 1,000점이 되어야 합니다. 점수가 될 만한 일을 말해 보시오” 그러자 그 사람이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저는 60년동안 한 교회에서 봉사하며 장로로서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아 그래요. 1점 되겠습니다. 또 있습니까?” 그 사람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정도면 굉장한 점수가 될 줄 알았는데 1점 밖에 되지 않으니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습니다. “저는 일생동안 한 아내의 남편으로서 한번도 한눈 팔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말했습니다. “훌륭하시군요. 1점 되겠습니다. 또 있습니까?” 그 사람이 또 말했습니다. “저는 살아 생전에 10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전도했고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목사 권사 장로가 되었습니다” 천사가 대답합니다. “1점입니다, 또요?” 이렇게 해서 그 사람이 이 땅에서 잘한 일을 아무리 찾고 또 찾아봐도 30점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 어떻게 하죠? 저는 아무래도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나 봅니다. 주님! 저는 잘한 일이 없지만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러자 천사가 손뼉을 치며 말했습니다. “이제 됐습니다. 이제 당신의 점수가 1,000점이 되었습니다. 통과!” 이렇게 해서 천국문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이 예화는 누가 만든 이야기지만 우리가 새겨 들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천국은 우리의 선행이나 공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은혜란 호의나 친절, 자비, 긍휼, 그리고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친절이나 사랑 등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은혜란 하나님이 값없이 베푸시는 선물, 특별히 아무런 조건 없이 죄인을 용서하고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초월한 사랑이란 뜻으로 사용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는 하나님의 은혜의 최고봉입니다. 이 은혜는 죄인이 구원을 얻는 유일한 통로와 수단이자 성도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동입니다. 이 은혜야말로 성도로 하여금 경건과 거룩한 삶을 유지하게 하는 지속적인 힘이 되며, 구원의 보증이 됩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의 뜻대로 주시며, 때를 따라 주시고, 쌓아두고 주시며, 풍성하게 주십니다. 이 은혜는 택한 백성에게 약속된 것으로 특별히 하나님을 사랑하며, 정직하고, 겸손하며, 긍휼을 바라며 죄를 회개하는 사람에게 주시기로 성경에 약속되어 있습니다.
2025년 2월 2일 <전도서의 헛됨(헤벨)의 의미>
전도자 솔로몬은 인생 말년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탄식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전도자는 헤벨(הֶבֶל)이란 단어를 이 구절에서 다섯 번이나 반복합니다. 헛되다로 번역한 히브리어 헤벨은 공허한, 텅빈, 무의미한, 허무라는 뜻입니다. 영어성경은 vanity(KJV), meaningless(NIV), futile(CSB)로 번역합니다. 헤벨(헛됨)이 전도서에 38번 등장합니다. 이 단어는 전도서의 처음과 마지막(1:2, 12:8)에 나오면서 전도서의 처음을 열고 마지막을 닫는 역할을 합니다. 헤벨(헛됨)은 전도서의 핵심 단어(key word)입니다. 전도자가 세상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쾌락을 누리고 난 후에 얻은 결론은 헛됨이었습니다.
인생이 헛된 이유는 끝이 있고 인생의 끝에는 죽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허무한 이유는 인생이 짧고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금방 지나갑니다. 전도서는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또한 인생이 허무한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을 때 느끼는 허무함은 세상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함입니다. 그런데 인생의 공허함을 채우고 인생의 의미를 알게 하는 단 하나의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전도자가 인생의 헛됨을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 안에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전도자의 인생관은 허무주의나 비관주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간인 영원(올람 עוֹלָם)의 관점에서 인생은 아주 짧다는 것을 인식하며 사는 것이 지혜라는 것입니다. 죽음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사는 사람은 오늘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알고 감사하며 기쁘게 삽니다. 인생의 짧음과 죽음을 인식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가 사는 모든 순간에 생명을 불어 넣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아끼라, 시간을 구원하라(carpe diem)는 전도서의 긍정적인 인생관은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에 바탕을 둡니다. 우리가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삶을 바라볼 때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인생의 목적을 알게 됩니다.
2025년 1월 26일 <오늘 예수님 믿기로 작정합시다>
사탄들이 전략회의를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세상 사람들을 유혹해서 지옥으로 더 많이 끌고 올 수 있겠느냐?가 회의의 주제였습니다. 첫 번째 사탄이 말하기를 “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러자 우두머리 사탄이 대답합니다. “그건 오래 전부터 써먹던 수법인데 이제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두 번째 사탄이 말하기를 “난 지옥이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죄를 더 많이 짓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사탄 대장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요즘 사람들은 지옥을 믿지 않는다.” 세번째 사탄이 말했습니다. “그러면 저는 사람들이 견딜 수 없는 큰 고통과 고난을 주겠습니다. 사람들이 고통을 많이 받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대장은 “고통을 주면 사람들은 순교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당하면서도 오히려 기뻐한다. 그 방법은 안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때 우두머리 사탄이 말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라. 서두를 것 없습니다. 천천히 예수 믿으시오,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누군가 만든 이야기이지만 그냥 웃고 넘기기에는 소중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마귀가 우리를 넘어뜨리는 가장 치명적인 무기는 고난이나 핍박이 아니라, 천천히 믿으라. 천천히 믿어도 늦지 않다는 영적 태만과 게으름입니다. 오늘 세상을 떠날 것도 아닌데 나중에 믿으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좀더 즐긴 다음에 하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예수 믿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천천히 먼 훗날 믿으라는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은 말씀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을 내일로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내일은 우리가 실제로 사는 날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을 삽니다.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받을 때는 바로 오늘입니다. 오늘이 은혜 받을 때요 구원 받을 날입니다.
2025년 1월 19일 <세상의 소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복음 5: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주님은 우리를 소금이라고 하셨을까요? 소금은 한가지 특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짠맛입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쓸모가 없습니다. 짠맛은 독특합니다. 짠맛은 소금으로만 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 예수의 제자는 독특한 맛을 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독특한 맛을 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과 구분이 안 된다면 그것은 짠 맛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소금은 여간해서 맛을 잃지 않는 성분입니다. 그런데 소금이 맛을 잃는 것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소금은 대부분 사해에서 나옵니다. 사해 주변의 염석(암염, 석염, rock salt)을 캐서 갈은 후에 소금으로 사용했습니다. 소금이 다른 물질과 섞여 있습니다. 암염을 갈아서 자루에 담아 보관할 때 잘못 보관하면 소금은 물에 약하므로 진짜 소금은 녹아 없어지고 다른 물질만 남게 됩니다. 소금 맛이 안나는 돌들을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밟고 다녔습니다.
소금은 맛을 내는데 꼭 필요한 물질입니다. 또한 방부제의 역할을 합니다. 음식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서는 얼리거나 말리거나 소금을 뿌렸습니다. 소금을 썩는 것을 방지합니다. 방부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바닷물은 썩지 않습니다. 바닷물 속에는 소금이 있기 때문입니다. 평균적으로 전 세계 바닷물의 염도는 약 3.5%입니다. 소금은 바닷물의 3.5%로 바다물을 짜게 만듭니다. 바닷물이 얼지 않고 썩지 않게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적은 수였지만 세상의 소금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수는 많습니다. 오늘날 사회는 부패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세상이 타락한 이유는 내가 소금의 맛을 잃어버렸고 방부제의 역할을 못했기 때문이라는 반성과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소금은 소량만 있어도 제 역할을 합니다. 소금이 녹아야 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 같은 존재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5년 1월 12일 <천국의 소망>
1980년 3월 프랑스 파리의 한 병원에 한 세기를 떠들석하게 했던 최고의 지성인이 입원했습니다. 그는 한 달 동안 병원에서 의사와 간호사에게 고함을 지르고 방문한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발악을 했습니다.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지를 아내에게조차 묻지 못했습니다. 아내 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남편에게 그의 병명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소리치고 괴로워하는 남편을 위로해주지 못하고 지켜보아야만 했던 불쌍한 여인과 20세기 최고의 지성인, 이 사람은 자유라는 이름 하에 수많은 글을 써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던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이며 그의 부인은 시몬 드 보부아르입니다. 사르트르는 입원한지 한 달만에 두려움 속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에 프랑스의 신문들이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르트르가 왜 비참하게 죽어야 했는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외쳤던 그의 마지막이 비참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때 한 독자가 신문사에 투고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사르트르의 말로가 비참했던 이유는 사르트르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미국의 피터 마샬 목사님은 세상을 떠날 때에 눈물을 흘리는 아내에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주님이 예비하신 천국 영원한 본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 14:1-3). 하나님이 허락하신 생애동안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열심히 살다가 주님이 부르시면 주님 곁으로 가서 이 세상보다 더 좋은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이므로 우리는 주님이 언제든지 부르시면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져도 우리에게는 영원한 하늘의 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손수 지으신 집, 이 땅의 어떤 집보다 더 좋은 집에서 주님과 영원히 살 것이므로 우리는 소망중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인생 최고의 날은 언제일까요? 천국을 사모하는 자에게 죽는 날은 인생 최고의 날입니다. 영광스런 집에 들어가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이제, 영원한 하늘 본향 집으로 돌아 갑니다. 그곳에서 또 만납시다.”하며 세상에서의 잠깐의 이별일 뿐, 영원한 본향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천국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5년 1월 5일 <믿음 소망 사랑이 충만한 교회 (A Church Full of Faith, Hope, and Love)>
첫째, 믿음.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예수님)을 믿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은 말씀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믿음에 대해 말했습니다. “믿음은 아직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 믿음에 대한 보상은 당신이 믿은 대로 보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소망. 성경은 우리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보다 더 좋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이사야 65장 17절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19장 27-28절에서 말씀하셨고, 베드로가 베드로후서3장 13절에서 말했고,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 21장에서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는 이 세상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의미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모든 것이 완전하고 아름다운 곳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곳에는 다시는 죽음이 없습니다. 다시는 질병이 없습니다. 다시는 눈물 흘리는 일이 없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사랑의 질서가 실현되는 곳입니다. 성도들은 이 아름답고 영원한 나라에서 영생의 복을 누릴 것입니다. 바울은 그곳을 체험하고 와서 그곳을 낙원(paradise)이라고 불렀으며(고후 12:4), 예수님께서도 그곳을 낙원이라고 하셨습니다(눅23:43). 새 하늘과 새 땅은 천국을 의미합니다.
셋째, 사랑.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큽니까?”라고 묻는 한 율법사의 질문에 주님이 대답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2:37-40). 사도 바울도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고 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우리에게 믿음, 소망, 사랑이 항상 있어야 하는데 그중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하십니다. 사랑은 영원하고 완전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믿음 소망 사랑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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