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목회서신
2024년 9월 29일 <고난 중에 기도하세요>
고난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고난중에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고난이 찾아옵니다. 인생에 하나의 고난이 왔다가 떠나면 또 다른 고난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고난을 기도의 초청장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고난을 기도하라는 신호로 알아야 합니다. C. S. 루이스는 “고난은 하나님의 메가폰”이라고 했습니다. 메가폰은 음성을 크게 하는 장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조용히 만나자”라고 말씀하셔도 사람들이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는 겁니다. 우리의 귀가 먹었으니 하나님께서 메가폰으로 크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날 C.S. 루이스가 옥스퍼드 대학 채플에서 설교하고 내려온 후에 한 학생이 다가와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선생님! 하나님이 정말 계신 것이 맞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많습니까? 죄없이 고통당하는 사람들,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은 왜 이렇게 많이 일어납니까?” 루이스는 잠시 눈을 감은 후, “나도 자네의 아픔에 100% 공감하네. 내 마음도 우리 인생 가운데 이해할 수없는 고난이 많음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네. 그러나 우리 인생 가운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이렇게 많아도 교만한데 만약 우리의 인생이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일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도대체 우리는 얼마나 더 교만하겠는가?”
고난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만날 때 기도해야 합니다.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기도는 온 세상과 우주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생을 겸손하게 맡기는 행위입니다. 이 순전한 행위가 기도입니다. 겸손하게 자신을, 자신의 삶을, 현재 처해있는 상황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 기도입니다. 고난에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고난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기도를 통하여 알게 됩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기도를 통하여 나 자신이 바뀌어가는 것입니다. 모든 고난의 순간에 기도로써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2024년 9월 22일 <일반 은총과 특별 은총>
시편 19편은 다윗의 가장 아름다운 시 중에 하나입니다. C. S. Lewis(루이스)는 이 시가 얼마나 그의 마음을 울렸던지 그의 책《시편 묵상 Reflection on the Psalms》에서 “시편 19편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위대한 서정시들 중의 하나”라고 하였습니다. 이 시가 서정시라 해도 감정만 넘치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그의 넘치는 감정을 조절하면서 그가 표현할 수 있는 언어로써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시는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는 1절부터 6절까지인데 자연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일반 은총과 일반 계시)을 노래하고, 둘째는 7절부터 14절까지인데 율법에 나타나는 하나님 말씀(특별 계시)의 유익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이 시를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가슴을 열어야 합니다. 머리가 아니라 심장으로 이 시를 읽어야 합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 중에 가장 중요한 분은 하나님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고 말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히브리 11장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니나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1-3).
‘어린왕자’(Little Prince)의 저자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ery)는 말했습니다. “It is only with one's heart that one can see clearly. What is essential is invisible to the eye.” (마음으로 보아야만 분명하게 볼 수 있어.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One sees well only with the heart. The essential is invisible to the eyes.” (마음으로 볼 때만 진정으로 볼 수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아.) 우리가 자연을 바라볼 때나 성경을 읽을 때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영광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4년 9월 15일 <부흥하게 하옵소서!>
구약성경 하박국 3장 2절에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O LORD, revive your work in the midst of the years! NKJV)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근거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교회의 재정이 늘어나고 교회의 사역이 활발한 것을 부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부흥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부흥하게’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하예후’입니다. ‘살게 하다’는 의미의 ‘하야’에서 나온 말입니다. 죽은 것과 다름없는 것을 다시 살린다는 의미입니다. ‘하야’라는 말을 영어로 번역할 때 “revive”라는 단어를 씁니다. 이 단어는 “다시 살린다.”(re-vive)라는 뜻입니다.
부흥은 교인수가 많아지고 교회의 규모가 커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교인수가 늘어나고 교회가 커지는 것이 부흥의 결과로 주어지지만 인간적인 방법이나 비성경적인 방법으로도 교회가 커지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크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내적 변화입니다. 교인수가 아무리 많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고 새롭게 변화된 사람들이 없다면 그것을 부흥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부흥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거듭남과 내적 변화입니다.
영국 웨스트민스터 교회의 설교자였던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 1899-1981) 목사님은 부흥(revival)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부흥이란 영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고, 그분께로 돌아가는 것이며, 그분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부흥은 영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부흥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부흥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부흥은 잘못된 생각과 행위를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부흥은 그동안 하나님이 아닌 것을 신으로 섬겼던 우상을(롬 1:23)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부흥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실 것을 기대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을 배우면 언젠가 참된 부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024년 9월 8일 <우리의 참 소망 예수 그리스도>
사무엘 베켓(Samuel Beckett)이 1950년에 발표한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 프랑스어En attendant Godot)이라는 희곡이 있습니다. 베켓은 이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이 연극은 어느 한적한 시골길,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방랑자가 언덕 밑에 있는 앙상한 나무 아래서 주머니에 손을 넣은채 서로 얼굴을 뜷어지게 바라보면서 ‘고도’(Godot)라는 미지의 인물을 기다리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들의 기다림은 어제 오늘에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기다림은 아주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고도라는 인물이 과연 누구인지 기다림의 장소와 시간이 확실한지 조차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을 죽이기 위해 지칠대로 지쳐 있는 그들은 온갖 노력을 다해 봅니다.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아직도 살아 있음을 실감하기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지루함, 초조함, 낭패감을 극복하기 위해 끝없이 지껄이는 그들에게 기다림의 한계가 왔을 때 나타난 것은 고도가 아니라 고도의 전갈을 알리는 소년이었습니다. 고도가 오늘밤에는 오지 못하고 내일은 꼭 오겠다는 전갈만 남기고 소년은 사라지면서 제1막이 끝납니다. 그리고 2막도 거의 같은 상황이 되풀이 됩니다. 극적인 사건의 전개 없이 너무 단순하게 진행이 되지만 그럼에도 배우들의 엉뚱한 대사와 동작을 통해 색다른 즐거움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다음 막이 이어져도 고도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고도는 누구일까 궁금증만 자아내는 것으로 연극은 끝납니다. 기독교 윤리학자 루이스 스메데스(Lewis Smedes)는 이 연극의 두 주인공이 기다리던 고도는 현대인들이 삶의 한 탈출구로써 매달리고 있는 허무한 공상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자신들이 기다리는 고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기대와 불안과 절망이 교차하면서 마냥 기다리며 서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하나님이 없는, 소망이 없는, 절망 상태의 현대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다고 해석했습니다. 소망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막연한 기대와 바램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확실한 약속이 있는 희망입니다. 막연하고 내용도 없고 약속도 보장도 없는 바램은 우리가 가져야 할 소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분명한 약속이 있는 기다림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약속있는 참 소망입니다. 그 분이 오시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분명한 약속이 있는 소망 때문에 어떤 상황도 극복해 나갈 수 있습니다. 약속 있는 소망 때문에 우리가 바람직하게 변화됩니다. 이 소망 때문에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2024년 9월 1일 <신앙 부흥>
저는 눈에 보이는 건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예배당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이 더 중요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우리는 내 안에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저의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요즘 저의 생각을 조금 바꾸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과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은 함께 세워져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읽어보면 신앙의 부흥이 일어날 때마다 했던 일은 성전을 수리하는 일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건물은 낡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수리하고 고쳐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태해지고 열심과 열정이 식기 쉽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고 새롭게 해야 합니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카톨릭 성당와 수도원을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 크고 아름다운 건물이 세워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수고와 사랑을 바쳤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의 크고 작은 헌신을 통해 예배당 건물이 높고 튼튼하게 세워진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동과 기도생활을 동시에 병행합니다. 한쪽 작업실에서는 십자가도 만들고, 사람이 죽을 때 사용하는 관도 만들고, 또 한 구석에서는 모자이크나 스테인 글라스를 한 조각 한 조각 깎고 붙이면서 자신의 신앙을 다듬어 갑니다. 그들은 건물 유지와 보수에 수십 년 계획을 세우고 일년 내내 쉬지 않고 작업을 계속합니다. 그런 일은 단지 눈에 보이는 건물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일이 아닙니다. 기도와 노동(말씀의 실천)을 병행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날마다 점검하고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게을러지고 뒤쳐지고 퇴색되는 것을 방지하고 날마다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새로와지고 부흥되기를 소원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하박국 3:2).
2024년 8월 25일 <신앙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예수님>
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가 1633년에 마가복음 4장 35절부터 41절까지 장면을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 풍랑 속의 그리스도(Christ in the Storm on the Sea of Galilee)’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 하늘은 짙은 먹구름이 덮여 있고 성난 파도가 배에 부딪쳐 하얗게 부서집니다. 배는 절반쯤 기울어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 같습니다. 뱃머리에 있는 제자는 끊어진 밧줄을 잡으려고 애쓰고 있고, 기둥(mast) 주위에는 네 명의 제자들이 돛(canvas)을 끌어당겨 기둥에 고정시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파도에 배가 넘어가지 않도록 밧줄을 잡고 배의 중심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불가능합니다. 이미 돛 줄 하나는 끊어져 바람에 날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배의 중앙에 있는 제자는 배바닥에 고인 물을 퍼내고 있습니다. 이들 여섯 명은 풍랑이 닥쳤을 때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한 명의 제자는 머리를 배 밖으로 내밀어 구토를 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 제자는 거센 바람에 날라가지 않도록 한 손으로 모자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닷줄을 꼭 붙잡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네 명의 제자는 예수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두 제자는 기도를 하고 있고 두 제자는 스승을 흔들어 깨우며 애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은 예수님만 바라보며 기도하고 있는데 다른 한 사람은 손을 모았지만 여전히 파도를 바라보며 공포에 질려 있습니다. 다른 두 제자는 예수님을 깨우며 현재의 위기를 이야기합니다. “선생님,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저희를 구해 주십시오.” 그들의 얼굴 표정에는 원망과 간절함이 섞여 있습니다. 이 그림의 한 가운데 있는 파란색 옷을 입은 사람은 렘브란트 자신이라고 합니다. 거센 바람에도 왼손으로 모자를 꼭 누르며 정면을 바라보는 사람이 렘브란트 자신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렘브란트와 누구든지 인생의 풍랑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렘브란트가 예수님과 제자들의 이야기 속에 자신을 그려 넣었을까요? 렘브란트는 가장 위대한 화가 중의 한 명이지만 그의 삶은 고난이 많았습니다. 네 자녀 중 세 명이 죽고 아내가 죽고 어머니가 죽고 파산을 당했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의 그림처럼 그의 인생은 폭풍이 몰려왔습니다. 그의 굴곡진 삶은 렘브란트를 깊은 내적 성찰로 이끌었습니다. 그의 인생의 아픔과 상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신실하심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믿음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그의 작품 속에 그려 넣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도 인생의 폭풍은 찾아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생의 풍파를 허락하시는 이유는 세상에 빼앗겼던 우리의 마음을 주께로 돌이키기 위함입니다. 인생의 위기는 하나님을 찾는 기회입니다. 인생의 폭풍이 몰려올 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을 깨우는 것은 바로 우리의 기도입니다.
2024년 8월 18일 <카르페 디엠(Carpe Diem)>
영화 <Dead Poets Society>(1989)는 명문대학에 가기 위해 주입식 교육으로 메말라가는 학생들에게 인간애와 자유를 심어주는 John Keating 선생님의 이야기가 감동적으로 그려집니다. 이 학교 입학식 날 존 키팅 새 영어 선생님이 부임합니다. 그는 처음부터 엉뚱한 수업 방식으로 학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듭니다. 시(詩 poets)를 공부하는 시간에 키팅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시를 알기 위해서는 운율, 음조, 비유를 먼저 따져 봐야 한다는 ‘시 원론’을 읽게 합니다. 칠판에 뭔가를 쓰면서 설명하는가 싶더니 다 지워버리고 “쓰레기!”라고 외칩니다. 그러면서 “시를 측정하려는 이 책의 페이지를 찢어 버려. 어서 찢어 버려. … 인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어. 의학, 법률, 경제, 기술은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해. 하지만 시와 미, 낭만, 사랑은 삶의 목적이야. 너희들은 너희의 시를 써야 한다. 시를 분석하고 해석하라는 그 페이지를 찢어 버려.” 존 키팅 선생님의 외침에 학생들은 서로 눈치보며 머뭇거립니다. 용기 있는 몇명의 학생들이 그 페이지를 찢어 버리고 나서야 다른 학생들도 따라서 합니다. 키팅 선생은 참 교육이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주며 학생들의 영혼에 불을 붙입니다. 이 영화는 삶에 필요한 수단들이 삶의 목적을 억압하는 사회가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것입니다. 물질만능주의가 인간사회의 소중한 가치들을 짓눌러버리고 삼켜버립니다. 무조건 명문대학에 가야 하고, 더 좋은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무한경쟁을 합니다. 그러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야망과 욕망만이 가득할 뿐, 남을 향한 이해와 사랑과 배려는 부족합니다. 시인이 죽든 상관하지 말고 나만 잘 살면 됩니다. 이 경쟁에서 뒤떨어지면 패배자가 되므로 고생스럽더라도 꾹 참고 공부만 하라고 끝임없이 강요합니다. 이 영화에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키팅 선생은 학생들에게 17세기 영국 시인 Robert Herrick(1591-1674)의 “To the Virgins, to Make Much of Time”이란 유명한 시에 나오는 첫 구절을 읽게 합니다. Gather ye the rosebuds while ye may, Old Time is still a-flying; And this same flower that smiles today, Tomorrow will be dying. 이 구절이’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말합니다. Carpe Diem 이란 ‘현재를 붙잡아라, 오늘을 즐겨라!’(seize the day, enjoy the present)로 해석되는 라틴어입니다. 이 말은 ‘시간을 구속하라’(redeem the time)는 뜻입니다. 댓가(속전)를 지불하고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빼앗긴 시간을 다시 찾아오라는 뜻입니다. 사단에게, 세상 쾌락에 빼았겼던 아까운 시간들을 다시 찾아 선하게 쓰라는 것입니다. 어두움 속에 머물던 시간들, 악하고 추한 것들을 위해 쓰던 시간들, 남을 비방하고 원망하던 일에 쓰던 시간들을 구속해서(redeem) 하나님을 위한 시간들로, 선한 일을 위한 시간들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시간도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시간은 내 것이 아닙니다. 시간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로서 시간을 바르게 잘 사용해야 합니다. Carpe Diem (Redeem the time)!
2024년 8월 18일 <바닷가 어린 소나무>
어느 날 바닷가 모래밭, 거북바위 옆에 어린 소나무 한그루가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거북바위는 자라다가 세찬 바람이 불었을 때 뿌리 채 뽑혀 날아간 다른 소나무들을 생각하며 어린 소나무에게 말도 걸지 않았습니다. 혼자 있는 외로움보다 친구를 잃어버리는 아픔이 더 크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날의 소나무들은 빨리 자라서 큰 나무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위로만 자라기를 힘썼습니다. 그러다가 세찬 바람과 폭풍이 불어오면 모두 뿌리 채 뽑혀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거북바위는 시간이 흐르면서 헤어질 땐 헤어질지라도, 그때까지만이라도 친구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어린 소나무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날 친구들을 폭풍에 다 잃어버린 아픔도 들려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들은 어린 소나무는 위로 자라기보다는 땅 밑으로 뿌리를 깊이 내리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그리고 짠물보다는 맑은 물을 마시기 위해 더욱 깊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그 어린 소나무 곁에 또 다른 어린 소나무들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세찬 바람이 불어오면 다 날아갈까 봐, 어린 소나무는 자기의 뿌리를 옆으로 뻗어 다른 어린 소나무들이 자기 뿌리와 얽히도록 붙들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강한 태풍이 불어왔고, 바다는 큰 파도가 일어났으며 온 천지는 깜깜해졌습니다. 거북바위는 이번에도 나무들이 다 날아가 버리고 친구들을 다 잃어버리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거북바위가 눈을 떴을 때, 놀랍게도 거기에는 어린 소나무들이 모두 그대로 살아 있었습니다. 자기들의 뿌리로 서로를 붙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거북바위와 아름다운 친구가 되어 큰 숲을 이루었고, 많은 새들과 사람들이 그곳에 와서 쉬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곳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부족하고 어린 소나무처럼 약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서로 붙들어줄 때,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위로하고 치유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2024년 8월 4일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에 광야에 들어갔을 때 매일 아침 들에 나가 만나를 수확해서 하루 먹을 수 있었습니다. 아침에 이슬이 마른 뒤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광야 지면에 깔려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서로 묻기를 “이것이 무엇이냐?”(What is it? 출 16:14)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만나를 처음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만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양식’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15절). 만나는 먹을 것이 부족한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기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습니다. 시편 78편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러나 그가 위의 궁창을 명령하시며 하늘 문을 여시고 그들에게 만나를 비 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나니 사람이 힘센 자의 떡을(천사의 빵을) 먹었으며 그가 음식을 그들에게 충족히 주셨도다.”(시 78:23-25) 그러나 만나를 먹어도 죽음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만나는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만 한시적으로 필요한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의 만나 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합니다. 요한복음 6장에는 오병이어 기적 이후에 예수님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과의 대화가 나옵니다. 사람들은 광야의 만나 사건을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자신들의 조상들은 모세를 통해서 만나를 먹었다는 것입니다. 만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특별한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 6:48-51) 우리가 광야 같은 세상에서 만나를 구하는 데에만 목숨을 걸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떡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영원한 생명 영생을 얻게 하십니다. 아멘.
2024년 7월 28일 <예수님의 아름다움 (The Beauty of Jesus)>
예수 그리스도는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앞에서 그의 용모가 변형되셨을 때 그 놀라운 아름다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마 17:1-8, 막 9:2-13, 눅 9:28-36).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밧모섬에 유배된 요한에게 보여주신 영광의 모습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었습니다(계 1:13-16).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 그분의 외모를 보면 대단히 아름다운 것이 없었습니다. 이사야 53장을 보면 고난받는 여호와의 종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는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라고 했습니다. 더욱이 가시관을 쓰시고 손과 발이 못 박힌 그리스도는 전혀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채찍질 당하시고 가시관 쓰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거기에 매달려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예수님의 모습은 고대 그리스의 미(美)라는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요? 남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대신 고통의 짐을 짊어지는 사람,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려고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의 아름다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영광과 위엄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역설적으로 오직 겸손과 십자가의 치욕의 모습에서만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고통을 받으신 예수님의 모습은 처참하지만 그 모습을 통해 우리를 위해 희생하시고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봅니다. 십자가는 본래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신 21:23). 다만 십자가는 자기 희생이라는 사랑의 표현으로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십자가의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데에서 출발합니다(갈 6:14).
성 어거스틴은 <고백록 Confessions>에서 “이제 나는 오래된 그럼에도 늘 새로운 아름다움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나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그의 인생에서 너무 늦게 사랑하게 된 것이 후회된다고 했습니다. “Late have I loved you O beauty so ancient and new, late have I loved you!”(Confessions 10,27,38). 우리는 그런 후회하지 않도록 예수님의 십자가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4년 7월 21일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
어느 날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es)가 대낮에 등불을 켜고 무언가를 열심히 찾으면서 아테네의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스승의 모습을 본 한 제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대낮에 등불을 켜고 무엇을 찾으십니까?” 디오게네스가 외쳤습니다. “어둡다, 어둡다.” 대낮인데도 한 밤중처럼 어둡다는 것입니다. 어둔 세상을 밝혀줄 진리를 구하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한 사람을 찾으라고 명하십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렘 5:1). 하나님은 ‘내가 너희를 멸하고 싶지 않다. 용서하고 싶다. 정의와 진리를 행하는 사람 한 사람만 찾으면 심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십니다.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의 계산법은 우리의 계산법과는 다릅니다. 우리에겐 숫자가 중요합니다.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적은 숫자,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중요한 일을 하실 때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십니다. 그 한 사람에게 모든 소망을 거십니다. 그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예레미야 5장 1절의 ‘진리’는 하박국 2장 4절의 ‘믿음’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구하는 자는 ‘진실함, 신실함, 믿음을 갈구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는 믿음으로 살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애쓰는 믿음의 사람, 의인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 숫자의 많고 적음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께 순종하고 헌신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세상의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남겨두신 남은 자(Remnant)로서 하나님께서 찾으시고 사용하시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24년 7월 14일 <나의 한 가지 소원 (One Thing Have I Desired of the Lord)>
시편 27편은 다윗이 지은 시입니다. 이 시편은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 때에 쓴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예루살렘을 떠나서 피난하는 중에 여호와께 바라는 소원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라는 한 가지 소원은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왕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대적을 이기고 승리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바라는 한 가지 소원은 그의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그를 사모하는 것이었습니다. 압살롬을 피해 예루살렘을 떠나는 그에게 가장 안타까운 것은 성전에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못보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서 예루살렘을 떠날 때, 화려한 왕궁을 떠나는 것은 안타깝지 않았습니다. 그가 성전을 떠나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다윗이 살던 왕궁은 화려하였습니다. 다윗 때에 성전은 아직 짓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장막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화려한 왕궁에 돌아가는 것보다 초라한 여호와의 집 성막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이란 책을 쓴 제임스 E. 화이트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러시아에서 한 교회의 주일 아침 예배 설교를 부탁받고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설교자는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이었습니다. 예배는 거의 세 시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첫째는 예배가 긴 것에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인들의 열의에 더욱 놀랐습니다. 3시간 내내 그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지루한 기색도 없었습니다. 예배가 끝난 뒤에도 집에 돌아갈 마음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화이트 목사님은 미국 교회는 한 시간만 지나면 여기저기서 수근거리며 난리가 나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러시아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러시아 목사님은 그 이유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몇 년 전만해도 러시아에서는 예배를 드리다 발각되면 감옥에 갔습니다. 그런데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이 되면서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너무 감격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또 언제 예전처럼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일이 올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이 마지막 예배인 것처럼 예배드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내 생애의 마지막 예배라고 여긴다면 예배드리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2024년 7월 7일 <약할 때 강하게 되는 역설의 진리>
중국에 리또슝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워치만니(Watchman Nee)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는 몸이 너무 약해서 사람들은 그가 30세를 넘기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몸이 몹시 약했기 때문에 늘 하나님을 찾았고 몸을 건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가 꿈을 꾸었습니다. 배를 타고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강 안쪽에 큰 바위가 배를 가로막아 건너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 배가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리또슝아, 이 돌을 옮겨주랴? 물 수위를 높여서 돌 위로 배를 타고 건너가게 해주랴?” 돌을 옮기는 것보다 강물이 불어서 돌 위로 배를 타고 지나가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 “하나님, 강물이 불어서 돌 위로 배타고 지나게 해주십시오”라고 구했습니다. 그러자 물이 순식간에 불어나서 돌이 물 속에 감춰지고 그는 배를 타고 그 돌 위로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하(Aha) 이것이 하나님의 메시지이구나! 내가 네 병을 고쳐주랴? 병을 그대로 두고 병을 이길 수 있는 큰 은혜의 강물을 부어주어 오히려 전보다 더 큰 은혜로 살게해주랴? 그는 이것이 그의 기도에 대한 응답인 줄 알고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은혜 없이 병이 낫는 것보다 오히려 병을 가지고 기도하므로 더 큰 은혜를 얻어 하나님의 종으로 사용되는 것이 좋사오니 은혜의 강물을 높여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평생 몸이 허약했고 옥에도 갇히는 등 수난과 고생도 많았지만 하나님의 큰 은혜로 70세까지 살면서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시련이 없고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가 가장 위험한 때다. 왜냐하면 그때 인간은 하나님을 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고난 없는 삶이 위험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있을 때가 오히려 안전합니다. 어려울 때 하나님을 찾기 때문입니다. 약함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주님만을 의지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얼마나 주님 앞에 겸손히 자신을 드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나의 능력과 강함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약함을 자랑하며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주님을 자랑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약할 때 주님의 강함이 나타납니다. 나의 약점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도구가 됩니다. 우리의 약함이 오히려 강함이 됩니다. “약할 때 강함 되시네”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주 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 수 없네, 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 이 찬양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2024년 6월 30일 <Time Tested Beauty Tips 시간이 증명한 아름다움의 비결>
세기의 여배우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 1929-1993)이 자녀에게 남겼다는 유언은 사실은 자기가 만든 말이 아니라 샘 레벤슨(Sam Levenson)의 시를 평소에 좋아해서 그것을 읊은 것이 유언이 됐다고 합니다. 그 시의 제목은 “Time Tested Beauty Tips”(시간이 증명한 아름다움의 비결)입니다.
1. For attractive lips, speak words of kindness. 매력적인 입술을 갖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해라.
2. For lovely eyes, seek out the good in people.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의 좋은 점을 보라.
3. For a slim figure, share your food with the hungry.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라.
4. For beautiful hair, let a child run his or her fingers through it once a day. 아름다운 머릿결을 갖고 싶으면 하루에 한번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해라.
5. For poise, walk with the knowledge you’ll never walk alone.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결코 너 혼자 걸어가는 것이 아님을 알도록 해라.
6. People, even more than things, have to be restored, renewed, revived, reclaimed, and redeemed; never throw out anybody. 물건보다 사람이 회복되어야 하고 새로워져야 하고 활기를 얻어야 하고 깨우쳐져야 하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 누구도 내버려서는 안 된다.
7. Remember, if you ever need a helping hand, you will find one at the end of your arm. 이것을 기억하라. 도와야 하는 손이 필요하면 너의 팔 끝에서 그 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8. As you grow older, you will discover that you have two hands, one for helping yourself, the other for helping others.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너는 손이 두 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는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 손이다.
2024년 6월 23일 <샬롬, 하나님의 평화>
히브리어 샬롬(שָׁלוֹם, Shalom)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었을 때 얻을 수 있는 평화입니다. 샬롬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알렸던 천사들은 그리스도가 참 평화는 주신다고 노래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이 평화는 죄인된 인간과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인류 구원에 관한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함으로써 얻을 수 있습니다.
샬롬, 평안은 예수님께서 주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이 평안은 고난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누릴 수 있습니다. 오히려 힘들수록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뚜렷히 나타납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샬롬은 받거나 거절할 수 있습니다. 만약 평화를 거절하면 평화를 주는 자에게 되돌아 옵니다.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마 10:12,13). 바울은 그가 전도한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인삿말로 시작했습니다.
이웃과 화평을 이루는 것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샬롬을 선물로 받았고 그것을 이웃과 나눠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팔복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마 5: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의 샬롬을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고후 5:18) 히브리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고 말씀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샬롬이 있기를!
2024년 6월 16일 <아바 아버지 (Abba Father)>
아바(Abba)는 아람어이고 아버지는 헬라어 파터(Pater)의 번역입니다. ‘아바 아버지(Abba Father, ἀββά πατήρ)’는 주님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처음 사용하셨습니다. 주님이 아버지를 향한 애정이 크고 그를 신뢰하는 마음으로 ‘아바’라고 부르셨습니다. 또한 아이들이 아버지와 친밀하고 사랑스러운 관계일 때 아버지를 ‘아바’라고 불렀습니다. ‘아바’는 우리말 ‘아빠’처럼 친밀과 신뢰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아바’는 항상 ‘아버지’라는 말이 뒤따릅니다. 두 분이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과 바울입니다. 성경에는 세 구절이 있습니다. 첫째, 마가복음 14:36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아바 아버지, 아버지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나의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막 14:36). 둘째, 바울은 로마서 8:15에서 “여러분은 다시 두려움에 빠지게 하는 노예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아들의 자격의 영을 받았습니다. 이 영 안에서 우리는 ‘아바 아버지’라고 외칩니다.” 셋째, 갈라디아서 4:6에서는 “여러분이 아들이기 때문에 그분의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으며, 아들의 영은 ‘아바 아버지!’라고 외치십니다.”
‘아바’는 ‘아버지’와 함께 쓰이며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을 강조합니다. 아람어와 헬라어 두 개의 다른 언어로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을 확인시켜 줍니다. 두 개의 다른 언어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보살펴 주실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신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영을 일깨우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영광을 받을 것이니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이 땅에서 고난도 능히 함께 받으라고 말씀합니다(롬 8:16-17). 고난을 받을 때 ‘아바 아버지여’라고 부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우리의 아바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담력을 얻게 되었습니다(히 10:19). 전지전능하시고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하신 은혜가 놀랍지 않습니까? 더 많이 더 자주 부르십시다. 이 이름은 우리의 특권입니다.
2024년 6월 9일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햇빛 따사로운 들녘에 시샘의 바람 불고
선악의 열매 소담스레 익어갈 때
한 마리 화사한 꽃뱀이 풀섶에 숨어 속삭이네
‘저 먹음직한 열매를 보아라, 얼마나 탐스러운가 그대가 지혜로와지기 원한다면 열매를 따게나’
붉은 입술에 넘치는 달콤한 유혹이
호기심에 불을 당기고 향긋한 내음 코 끝에 스쳐
하늘 높이 거친 손 휘두르며 금단의 가지 꺾어 열매를 취했네
쓰디쓴 맛에 놀라 환히 트인 눈이여!
순간 벌거벗은 알몸이 부끄러워
무화과 큰 잎으로 앞자락을 가리고
동산 우거진 나무 숲에 몸을 숨기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 (중략) (출처: 남상학 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말씀은 아담이 범죄하여 하나님과의 교통과 교제가 단절되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깊은 사랑과 호의를 가지고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 부르시는 긍휼의 음성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잊지 않으시고 회복시키기 위해 찾아오신 사랑의 음성입니다. 이 말씀은 본래 하나님 안에 있던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음성입니다(마 18:12-13, 눅 15:3-7).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말씀은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면 살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생명의 음성입니다(요 15:1-6). 이 말씀은 “너는 내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다. 너는 나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 내 마음에서 너를 사랑하는 것을 아무도 끊지 못한다.” 라는 선언입니다(롬 8:31-39). 하나님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서 숨어있는 죄인들을 먼저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든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2024년 6월 2일 <하나님의 관심과 나의 관심은 같습니까>
하나님은 무슨 일에 가장 큰 관심을 갖고 계실까요? 하나님의 최대 관심은 구원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최고의 관심은 사람들의 영혼 구원에 있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든 안 믿든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부자든 가난하든 많이 배웠든 적게 배웠든 나이가 많든 적든 정상인이든 장애인이든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 자체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5)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은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동시에 공의이시기에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쏟으시면서도 각 사람의 인생의 종말에는 천국과 지옥으로 나눌 것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이 바라고 원하시는 최고 소원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에게 있고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이 최고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고 말씀합니다.
먼저 믿은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관심을 나의 관심으로 삼고 살고 있나요? 사람들의 관심은 주로 이 세상에 있고 나에 관한 것에 있고 육신적인 문제에 있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관심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소원이 나의 관심과 소원이 되어 복음의 일꾼으로 쓰임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2024년 5월 26일 <헨리 나우웬의 섬김의 삶>
헨리 나우웬(Henri Nouwen 1932-1996)은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 신학교 교수를 했던 분입니다. 그분은 세상적으로 가장 명예로운 자리에 있을 때 주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자기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누리고 있는데, 예수님이 섬겼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지 못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예일대학 교수직을 내려놓고 남미 페루에 가서 빈민가에서 2년 동안 가난한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의 고백에 따르면 그때 그들에게서 참사랑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그들이 주님만을 바라보고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다시 그가 하버드대학에 가서 교수로 있다가 “나의 남은 여생을 강단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한 섬김의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고, 캐나다에 있는 L’Arche Daybreak 라는 정신지체아 공동체에 가서 그들을 십 년 넘게 섬기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의 마지막 책인 ‘안식의 여정’(Sabbatical Journey, 1988)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지난 8년 동안 나의 친구들, 나의 가족들이 세상을 떠났다. 내가 세상을 떠날 날도 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이전에 결코 들어보지 못한 깊고 강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음성을 들었다. 나는 예수님의 사랑의 음성을 의지하며 그대로 따르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 음성에 의해 내 짧은 생애의 저편에 있는 세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 되시는 곳으로 이끌림 받기 원한다.” 또한 그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이곳에서 장애아들을 돌보는 동안 그 아이들은 내 명성, 내 지식, 내 인기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오직 그 아이들에게 관심이 있던 것은 내가 그들을 사랑해 주고 그들의 사랑을 순수하게 받아들여주는 것 한 가지밖에 없었다. 나는 이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새롭게 체험하는 놀라운 삶을 살았다.”
아무리 지식과 명예가 많아도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살지 않았다면 나중에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주님의 칭찬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작은 자를 사랑으로 섬기는 것을 기쁨으로 아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024년 5월 19일 <성령강림절>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50일째가 되는 날 성령이 오신 성령강림절은 유월절 이후 50일째가 되는 날인 오순절(五旬節)과 겹치기 때문에 성령강림절을 오순절(Pentecost)이라고도 합니다.
2천년전 오순절날 성령 강림으로 기독교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행 2장). 기독교의 성령강림절은 유대교의 오순절과 같은 시기에 옵니다. 오순절은 보리농사에서 얻은 첫 곡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던 맥추절이었습니다. 유대교 랍비들은 이날을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히브리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신 날로 기념하였습니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러한 유대교의 오순절의 의미를 재해석하여 “구약에서 하나님이 히브리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십계명을 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새로운 섭리에 의한 은총의 선물로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셨다”고 해석합니다.
성령의 오심은 공간적 시간적으로 제한적인 존재였던 그리스도가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성령을 통하여 초공간적으로 우리 가운데 실존하십니다. 성령은 시간과 공간적인 제약을 넘어서 초월적인 존재로서 세례를 통해 우리 속에 들어오시고,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치시고, 복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하시며,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도록 변화시켜 주십니다.
성령강림절은 성령의 불과 구주의 보혈과 순교자의 피를 상징하는 빨간색을 사용합니다. 성령강림절에는 제단이나 교회입구를 빨간 장미로 장식하는데 빨간 장미는 신부가 결혼식에서 드는 화환색으로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가 신랑인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표증입니다. 우리가 성령강림절의 유래와 의미를 이해하고 더욱 성령을 사모하고 간구하여 성령충만함을 받아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2024년 5월 12일 <어머니 존중과 효도>
예수님의 첫 번째 이적은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입니다. 결혼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마리아의 마음이 몹시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아들 예수에게 말했습니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구나.” 이때 예수님은 어머니의 부탁을 공손히 거절하셨습니다. “어머니,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잠시 후 예수님은 생각을 바꾸셨습니다. 그리고 하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예수님은 분명히 ‘아직은 내 때가 아니라’고 하셨는데 왜 생각을 바꾸셨을까요? 그것은 어머니 마리아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마리아를 어머니로 인정한 것이요 어머니의 권위에 존경을 표시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메시야의 이적이지 사람의 눈을 속이는 요술이 아니었습니다. 물에 첨가물 없이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 물의 성질이 변한 것인데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영국의 시인 바이런(Lord Byron 1788-1824)이 옥스포드 대학교에 다닐 때 학기말 시험을 치루고 있었습니다. 시험 문제는 “그리스도가 물로 포도주로 만든 이적의 의미를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두 시간 동안 열심히 답안을 쓰고 있는데 바이런은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이제 시험 시간이 거의 끝나가는데도 그는 한 단어도 쓰지 않았습니다. 시험감독관이 그에게 다가와서 시험지를 제출하기 전에 뭐라도 쓰라고 요구했습니다. 바이런은 단 한 문장만을 적었습니다. “물이 주인을 만나니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더라. The water met its Master, and blushed.” 이 답안지가 그 학기의 최우등 점수를 받았다고 합니다. 주님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어머니 마리아의 말에 순종하셨습니다. 주님은 참된 효도란 사람들 앞에서 어머니에게 존경을 표시하는 것임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만약 자녀가 어머니를 무시한다면 다른 사람들도 여러분의 어머니를 무시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어머니에게 사랑과 존경을 표시한다면 다른 사람들도 여러분의 어머니를 존중할 것입니다. 효도는 사람들 앞에서 어머니를 존중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머니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 효도입니다.
2024년 5월 5일 <General MacArthur’s Prayer for His Son>
Build me a son, O Lord, who will be strong enough to know when he is weak; and brave enough to face himself when he is afraid; one who will be proud and unbending in honest defeat and humble and gentle in victory.
Build me a son whose wishes will not take the place of deeds; a son who will know Thee — and that to know himself is the foundation stone of knowledge.
Lead him, I pray, not in the path of ease and comfort, but under the stress and spur of difficulties and challenge. Here let him learn to stand up in the storm; here let him learn compassion for those who fail.
Build me a son whose heart will be clear, whose goal will be high, a son who will master himself before he seeks to master other men, one who will reach into the future, yet never forget the past.
And after all these things are his, add, I pray, enough of a sense of humor, so that he may always be serious, yet never take himself too seriously.
Give him humility, so that he may always remember the simplicity of true greatness, the open mind of true wisdom, and the meekness of true strength.
Then I, his father, will dare to whisper, “I have not lived in vain.”
더글라스 맥아더가 그의 아들을 위해 쓴 기도문입니다. 정말 훌륭한 기도입니다. 또한 저는 에베소서 1장의 바울의 기도에 우리 자녀의 이름을 넣어 기도하면 좋은 기도가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에게 주셔서 아버지를 알게 하시고, ○○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를 부르셔서 ○○에게 주신 그 소망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에게 주신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그 능력이 얼마나 큰 지를 ○○가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엡 1:17-19, 표준새번역)
2024년 4월 28일 <전도는 주안에서 사랑하는 것>
전도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 구원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 구원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들)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 하나를 찾지 않겠느냐? (마 18:12-14, 눅 15:3-7) 라고 하시면서 잃은 양 하나를 찾아 나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 있는 양 99마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잃은 양 한 마리가 너무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습니다(마 16:26). 전도는 천하보다 더 귀한 하나님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 구원하는 일입니다.
전도는 주안에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어떤 사람을 교회로 인도해서 교인 숫자를 늘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전도는 그 사람을 사랑해서 예수님을 알게 하고 믿도록 도와 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안타까운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전도가 가능합니다. 사랑하면 그 사람의 필요가 보이고 그 필요를 채워주게 됩니다. 정말 아끼고 사랑하고 도우려는 마음이 있으면 그 마음은 전달됩니다. 전도받는 사람은 이 사람이 왜 나에게 이렇게 잘 해주는지 경계하면서도 궁금해합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교회로 인도하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마음문을 닫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정말 자신을 사랑하고 도우려는 마음이 있다는 생각이 들면 마음문을 열게 됩니다.
전도는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고 관심과 사랑을 주고 섬기는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기대하는 것이 아닌, 그저 돕고 기도해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안되면 만나지 않고 관심이 없는 이기적인 세상에서, 조건 없이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나누고 마음을 주고 시간을 주는 섬김과 사랑에 마음이 끌리는 것입니다. 전도는 상대방을 사랑의 마음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전도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알고 믿게 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전도하여 영혼구원의 열매를 맺는다면 참으로 기쁘고 보람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도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입니다. 주안에서 사랑으로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2024년 4월 21일 <응답 받는 기도의 비결>
죠지 뮬러(George Muller 1805-1898)는 역사상 기도 응답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5만번 이상의 기도 응답을 받은 죠지 뮬러는 프러시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젊어서는 아버지의 지갑을 상습적으로 뒤져 돈을 훔칠 정도로 문제아였지만 1825년 11월 어느 토요일 저녁 기도 모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에 감동을 받아 회심하게 됩니다. 1835년 할레 대학을 졸업한 그는 선교사로 영국으로 건너가 브리스톨 애슐리 다운(Bristol Ashley Down)에 고아원을 세워 2천명이 넘는 고아들을 기도로 양육했습니다. 1898년 93세의 일기로 소천하기까지 그는 15만명의 고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해 주었고 오늘날까지 ‘고아의 아버지’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죠지 뮬러가 가장 시간을 많이 들여 기도한 제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어렸을 때부터 같이 삶을 나누었던 5명의 친구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한 일입니다. 뮬러는 다섯 명의 친구를 위해서 계속 기도했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안 믿는 친구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뮬러는 이 두 친구를 위해서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무려 52년간 두 친구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래도 안 믿었습니다. 뮬러는 이제 늙어 병석에 눕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서시히 자기 인생의 마지막 날이 가까와 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날 그는 있는 힘을 다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내가 오늘 우리 사랑하는 교회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십시오.” 그는 자기 인생의 마지막 남은 힘을 가지고 간절하게 최후의 설교를 했습니다. 마지막 설교를 하던 날 그의 한 친구가 거기에 참석했다가 뮬러 목사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나머지 한 친구는 안 믿었습니다. 뮬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후에 그 때까지 안 믿고 있던 친구가 뮬러의 죽음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그는 뮬러가 자기를 위해서 52년간이나 기도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뮬러가 죽은 바로 그 해 그 소식을 들은 그 친구는 결국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가 믿고 나서 전 영국 땅을 순회하면서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뮬러 목사의 기도는 다 응답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최후의 응답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기도도 다 응답됩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의 구원을 위해 끈기있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 받습니다.
2024년 4월 14일 <Easter Every Day>
부활은 우리 주 예수님이 세상 끝날 재림하실 때 우리들도 주님처럼 부활할 것입니다. 이것은 미래에 일어날 일입니다. 동시에 부활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here and now)’ 경험해야 하는 현재의 일입니다. 악하고 험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어느 순간 갑자기 나의 건강에 이상이 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지 않습니까? 한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직장이나 사업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힘든 문제로 낙심과 절망을 경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럴 때, 인생을 살아갈 소망을 잃어버리고 좌절하고 있을 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다시 사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의지하면 우리가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힘든 일로 잠시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날마다 경험하는 부활 또는 일상에서의 부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날마다 부활절이어야 합니다. Easter Every Day! 우리가 사는 모든 날이 부활절입니다.
우리가 매년 맞이하는 사순절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고 고난주간의 성금요일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사흘만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은 예수님이 매년 고난주간에 죽으셨다가 부활절에 다시 부활하시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예수님께서 나 같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한 번 죽으셨다가(롬 6:10, 히 10:12),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도 한 번입니다. 우리 주님은 “단번에(once and for all)” 그의 몸을 많은 사람을 위한 속죄제물로 드리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도 살아계시고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단 한 번으로 그 효력은 영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낙심과 절망에 빠질 수 있기에 우리가 매년 사순절과 부활절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영생의 소망을 우리의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바로 우리 죄, 나의 죄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주께서 부활하신 것도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함이요,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부활과 영생의 약속을 주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나의 부활이라는 신앙으로 날마다 부활을 체험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매일이 부활절입니다.
2024년 4월 7일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순절에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알고 싶어서 기도하고 금식도 했는데 주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절이 지난 후에 여러분의 삶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신앙생활은 어떤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내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 하루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가운데 주님의 동행하심과 도우심과 교제를 느끼면서 살 수 있다면 그것이 승리의 삶입니다.
만약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이 갑자기 무너진다면 우리가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죽게 될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지는데 우리가 어디로 피하겠습니까? 어떤 분은 마음 속으로 생각하실 것입니다. ‘하늘을 받치고 있는 기둥에 어디 있어요?’ 그런데 실제로 하늘이 무너지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너무나 갑자기 놀랍고 두려운 일을 당하면 하늘이 무너지는 일을 경험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때로는 하늘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특별한 관심과 관리를 하지 않는 동안에도 우리 몸안의 장기들은 쉴 새 없이 자기가 맡은 일을 충실하게 일하면서 우리의 건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 몸 안의 어떤 장기(기관) 하나가 잘못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 한 부분만 고장난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것과 연관되어 있는 다른 기관들이 제대로 작동을 못하게 됩니다. 병이 중하게 되어 우리의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의 몸은 어느 한 순간 무너질 수 있는 연약한 천막과 같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5:1)
성실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으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는 믿음과 확신을 갖는다면 근심과 걱정 불안이 줄어들 것입니다. 평안과 안정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믿는 확신 속에서 자신감을 갖고 살아갈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날마다 경험하는 “현재의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부활절은 일년에 한번 기념하지만 삶 속에서의 부활은 날마다 경험해야 하는 일입니다.
2024년 3월 31일 <빈 무덤과 부활>
스탠리 존스(Eli Stanley Jones, 1884-1973)가 인도에서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설교 도중에 한 이슬람교도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이 못 가진 것을 가지고 있소. 우리는 메디나에 가면 마호멧의 시신이 담겨있는 관이 있고 또 무덤이 있소, 정말 마호멧이라는 사람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기독교는 예루살렘에 가보시오. 빈 무덤밖에 없지 않소.” 그때 스탠리 죤스 박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질문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당신의 말이 진실인데 그것이 바로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빈 무덤인 것입니다.”
20세기 초 영국의 유명한 저널리스트였던 Frank Morison은 부활 신앙을 조롱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부활이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빈 무덤의 신화”(the myth of empty tomb)를 파헤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오랜 기간 성경의 내적, 외적 증거들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빈 무덤의 신화’를 증명하기보다 그 자신이 변화했습니다. 그는 성경의 부활 기록이 신화나 허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임을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1930년, 그는 부활의 진실성을 변증하는 <누가 돌문을 옮겼는가? Who moved the stone?>이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모리슨은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조차 빈 무덤의 존재를 부인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랐습니다.
1945년 4월 8일주일 아침 본회퍼 목사님이 감옥에서 아침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험악하게 생긴 두 사내가 감방을 향하여 소리쳤습니다. “죄수 본회퍼, 우리를 따라와!” 이제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순간이 된 것입니다. 같은 감옥에 있던 한 사람이 본회퍼 목사님을 향해 말했습니다. “목사님, 마지막입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하고 인사했습니다. 본회퍼 목사님은 미소를 지으며 평화스러운 얼굴로 말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지금이 시작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믿는 자에게 육신의 죽음은 전혀 새롭고 영광스러운 삶의 시작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모시고 살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2024년 3월 24일 <십자가 사랑의 그리스도가 온 세상을 영원히 다스리신다>
종려주일에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겸손하고 낮아진 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낮은 자로 오셨습니다. 주님이 몸소 겸손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빌 2:5-8).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은 연약함과 고난으로의 길입니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의 표현을 빌리면, 예수님의 입성은 “연약함으로의 여정”(A journey into his weakness)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고통과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선택하셨습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 당했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제, 시저, 샤를 마뉴 대제 그리고 나도 위대한 제국들을 건설했다. 그러나 우리 같은 영웅들이 무엇으로 제국을 이뤄냈는가? 무력이다, 하지만 예수만이 사랑으로 자신의 제국을 건설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예수를 위해 죽겠다는 사람들이 수백만명이 있다…. 예수는 사랑으로 전 세계를 정복했다.” 나폴레옹이 깨달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힘이나 무력으로가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으로 세상을 정복하였고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다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력으로 세계를 지배한 로마 제국은 멸망하여 역사에서 사라진 지 오래 되었으나 (서로마는 A.D. 476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당하고, 동로마는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당함), 십자가의 사랑으로 섬기신 예수님은 복음으로 온 세상을 정복하고 만왕의 왕으로서 영원히 다스리십니다. 십자가 고난이 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고난 주간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신 것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십자가의 도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2024년 3월 17일 <한 알의 밀>
종교 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이 쓴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1536)는 4권으로 구성된 방대한 책입니다. 그는 제3권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요약을 했습니다. 그 내용은 한 마디로 “죽어야 산다”는 것입니다.
씨앗은 배아와 배젖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배젖에는 다량의 녹말과 단백질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한 알의 씨가 땅에 떨어지면 배젖이 분해되기 시작합니다. 이때 나온 열과 영양분을 공급받은 배아는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위로는 싹을 냅니다. 그리고 배젖이 완전히 분해되어 없어질 때쯤 싹이 스스로 광합성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자랍니다. 이때 처음 땅에 묻힌 씨앗은 사라집니다. 하지만 그 존재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한 알의 밀은 죽어서 약 4개월 후에 백 배의 열매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24) 이 비유에서 한 알의 밀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의 낮고 천한 마굿간의 구유 위에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십자가에서 죽고자 하십니다.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죽음이 비참하고 허망한 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제물로 내어주는 사랑의 극치이며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일입니다.
예수님이 한 알의 밀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처럼 우리들도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와서 죽으라는 명령과 같다.” 우리는 죽음으로써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음으로써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4년 3월 10일 <새봄 기도 – 정연복>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
생생히 기억합니다
긴긴 겨우내
폭 익은
새 술같이 좋은 봄이
지금 내 앞에 있으니
나의 가슴
깨끗한 새 부대 되어
새봄을 담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소서
2024년 3월 3일 <하루를 시작하는 기도>
하나님, 오늘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 마음을 당신의 거처로 삼아주십시오.
종일토록 우리 안에 머무시어
우리가 잘못과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십시오.
오늘 하루 우리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게 해주시고
선한 일을 행하게 해주십시오.
우리를 도우시어 주님과 더불어, 그리고 이웃들과 더불어
깊은 사랑의 친교 속에 머물게 해주십시오.
오늘 우리가 다른 이들이 주님께 바치는
기도의 응답이 되게 해주십시오.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 지극히 사랑하시는 이 세상에
희망의 징표로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영국 감리교회 공동예식서에 나오는 ‘하루를 시작하는 기도’입니다.)
2024년 2월 25일 <인생은 아름다워 Life Is Beautiful>
이탈리아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Life Is Beautiful’ (Original title: La Vita E Bella, 1997)의 주인공 구이도(Guido Orefice)라는 한 유대인 남자는 호텔 식당의 웨이터로서 긍정적인 인생관과 유머 감각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운명처럼 다가온 도라(Dora)라는 여인을 사랑하게 됩니다. 도라는 돈많고 거만한 공무원과 약혼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그녀는 구이도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고 결혼하게 됩니다. 그들은 날마다 행복한 삶을 사는 가운데, 둘 사이에 사랑스런 아들 기오수에(Giosuè)가 태어납니다. 이 영화의 전반부는 평범한 일상의 행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의 중반부터 그들의 삶은 완전히 바뀝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이탈리아의 북부 지역이 독일 나찌에 의해 점령되고, 구이도와 그의 아들 기오수에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강제로 수용소로 끌려갑니다. 남편과 아들을 사랑하는 도라는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면서도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있기 위해 자원하여 수용소로 가는 열차를 탑니다. 수용소에 도착한 순간부터 아버지 구이도는 그의 아들에게 이것은 게임(놀이)이라고 설명합니다. 아들을 두려움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계획입니다. 장난감 탱크를 좋아하는 아들에게 게임에서 1,000점을 제일 먼저 받는 사람은 진짜 탱크를 선물로 받을 수 있다고 약속합니다.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거나 배고프다고 말하면 점수를 잃고, 불평하지 않고 조용히 지내면 추가 점수를 얻게 됩니다. 아이는 때로는 게임의 규칙을 마지못해 따랐지만 아버지는 아들에게 게임을 계속하라고 설득합니다. 그 두 사람은 아슬아슬한 위기를 넘기며 끝까지 살아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독일은 전쟁에서 패배하고 혼란한 틈을 타서 구이도는 아내를 찾으러 여자 수용소로 가다가 독일군에게 붙잡힙니다. 그리고 구이도는 작은 상자 속에 숨어 지켜보는 어린 아들을 바라보며 게임을 계속 하라고 눈짓으로 신호합니다. 그리고 그는 두려움에 떠는 아들을 위로하기 위해 독일군의 총대 앞에서 게임을 하듯이 우스꽝스럽게 걸어갑니다. 구이도의 죽음을 알리는 총소리가 들리고, 어린 아들은 독일군이 모두 철수한 뒤, 텅 빈 수용소에 홀로 남습니다. 다음 날 수용소 안으로 미군의 탱크가 들어오고 아이 앞에 멈춰 섭니다. 미군은 아이를 탱크 위에 올라 타게 합니다. 마침내 그의 아버지가 약속한 대로 진짜 탱크를 상으로 받은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지막 장난치듯이 우스꽝스럽게 걷는 걸음은 세상에 홀로 남아야 하는 아들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이렇게 말을 전하는 것 같습니다. “아들아. 인생은 아름답단다. 그러므로 안심해라. 하나님은 어떤 역경과 환란 가운데서도 너와 함께 한단다!” 사랑하는 아내를 찾으러 가다가 독일군에 의해 붙잡혀 끌려가는 구이도의 마지막 장면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모진 고난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생각나게 합니다. 사랑하는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2024년 2월 18일 <사순절 기도 – 정연복>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고 시험받던
예수님 모습을
마음속에 떠올립니다.
예나 지금이나
진실한 믿음의 길은
화려한 꽃길이 아니라
고통과 시련의 길이라는 것.
십자가의 죽음 없이는
부활의 기쁨 또한 없음을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늘 기억하게 하소서.
(출처: 정연복 시인 블로그: http://blog.naver.com/yeunbok5453)
2024년 2월 11일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이웃과 나누기>
예수님 안에서(in Christ) 참 기쁨을 발견한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오히려 주위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감동을 줍니다. 신디 크로터(Cyndi Crother)의 <살아 숨쉬는 물고기를 잡아라> (원저: Catch!: A Fishmonger’s Guide to Greatness)라는 책을 보면, 매트 라이언(Matt Ryan)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Matt Ryan은 시장에서 물고기를 파는 직업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한 손님이 연어를 사러 Ryan의 가게에 왔습니다. Ryan은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손님이 원하는 연어를 고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Ryan은 손님의 까다로운 요구 사항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다 들어 주면서 기쁘게 일을 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손님의 마음도 즐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Ryan의 즐겁게 일하는 모습에 감동된 손님은 처음에 연어 반 마리만 사려는 마음을 바꾸어 세 마리를 통째로 샀습니다. 이 책을 쓴 저자는 이렇게 끝을 맺었습니다. “아마도 그 손님이 라이언에게서 산 것은 세 마리 연어가 아니라 라이언이 즐겁게 일하는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그 손님은 연어를 요리하면서 라이언과 함께 보냈던 즐거움을 기억할 것이다.” 기쁨과 즐거움은 주위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전염이 되는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항상 즐겁게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Ryan 이 예수님을 모시고 살 때 항상 기쁘게 일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6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나의 힘으로는 항상 기쁘게 일을 못합니다. 그러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 4:13). 대개 사람들은 무엇을 ‘소유했기 때문에(because of possession)’ 행복합니다. 그래서 그 소유물을 잃어버리면 불행해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안에서 발견한 기쁨과 영생의 약속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 행복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행복은 환경과 조건에 따라 달라지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누리는 기쁨(joy)은 환경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거룩한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2024년 2월 4일 <요한 웨슬리의 언약 기도문 John Wesley’s Covenant Prayer>
저는 더 이상 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일에 저를 붙들어 매시고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들에게 저를 붙이소서
저를 행하게 하시고 저에게 고난을 주소서.
저를 주님께서 고용하소서 주님의 처분에 맡깁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를 높이시고 혹은 저를 채우기도 하시고 비우기도 하소서.
저에게 모든 것을 주기도 하시며 또한 제게서 모든 것을 가져 가기도 하소서.
제 모든 것을 주님의 기쁨을 위해 쓰시도록 기꺼이 그리고 마음 다해 드립니다.
오, 영광스럽고 복되신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이시여, 저는 주님의 것이요, 주님은 저의 것입니다. 그렇게 되게 하소서.
제가 이 땅에서 맺은 이 언약을 하늘에서도 확증하여 주소서. 아멘
I am no longer my own, but thine.
Put me to what thou wilt, rank me with whom thou wilt.
Put me to doing, put me to suffering.
Let me be employed by thee or laid aside for thee, exalted for thee or brought low for thee. Let me be full, let me be empty.
Let me have all things, let me have nothing.
I freely and heartily yield all things to thy pleasure and disposal.
And now, O glorious and blessed God, Father, Son, and Holy Spirit, thou art mine, and I am thine. So be it.
And the covenant which I have made on earth, let it be ratified in heaven. Amen
2024년 1월 28일 <O God, What Offering Shall I Give?>
오 하나님, 땅과 하늘의 주인이신 당신께 내가 무엇을 바치오리까?
나의 마음과 영혼과 육체를 바치오니 거룩한 산 제물로 받으소서
보잘 것 없지만 내가 지닌 모든 것입니다. 지금 받으시는 것이 나의 모두입니다.
나의 하나님, 당신은 이제 나의 영혼을 가지셨습니다. 더 이상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의 것을 지키시고 크신 손으로 움켜잡으시어 희망으로 흥겹게 하시고 사랑으로 불타게 하소서
당신께서 나의 마음을 가지셨으니 끝날까지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소서.
당신은 나의 육체를 가지셨으니, 당신의 거룩한 처소를 당신의 뜻하는 대로 쓰소서
여기에 당신의 빛을 영원히 비추시고 이 집을 당신의 임재로 가득 채우소서
오. 삶의 근원이여! 이 몸 안에 사시고 이 몸 안에 움직이시어 마침내 내 모든 삶이 그대로 사랑이게 하소서.
O God, what offering shall I give? To you, the Lord of earth and skies!
My spirit, soul, and flesh receive, A holy, living sacrifice!;
Small as it is, ’tis all my store; More should you have, if I had more.
Now then, my God, you have my soul. No longer mine, but yours I am;
Guard your own, possess it whole. Cheer it with hope, with love inflame!;
You have my spirit, there display Your glory to the perfect day.
You have my body, your holy shrine, Devoted solely to your will;
Here let your light forever shine, This house still let your presence fill;
O Source of life, live, dwell, and move. In me, till all my life be love!
(이 시는 Johann Joachim Lange(1670-1744)의 찬송가사를 요한 웨슬리(1703-1791)가 독일어에서 영어로 번역)
2024년 1월 21일 <놀라우신 하나님 Awesome God>
여러분은 하늘의 별들을 세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꿈이 많던 어린 시절,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세다가 중단했습니다. 밤에 맨눈으로 볼 수 있는 별들은 대략 2,500개 정도라고 합니다. 크고 밝은 별들을 중심으로 세다가 어떤 별을 빠뜨렸는지 헷갈리다가 결국 포기했습니다. 공기가 맑은 한적한 시골에 가면 하늘을 가로지르는 은하수를 볼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별들이 하늘을 강처럼 흘러가는 것처럼 보여서 ‘은하수(銀河水), Milky Way’이라고 불렀습니다. 은하계(Milky Way Galaxy)는 태양계가 포함된 ‘우리 은하’(Our Galaxy)를 말합니다. ‘다른 은하’들은 ‘우리 은하’에서 수백만 광년에서 수십억 광년 떨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맨눈으로는 보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별들은 거의 ‘우리 은하’에 속해 있는 것들이고 지구에서 1,000광년 정도 떨어진 별들이 대부분입니다.
빛은 1초에 300,000 km 이동합니다. 1초에 지구를 7바퀴 반을 도는 속도입니다. 광년(light year)은 빛의 속도로 일년 동안 가는 거리입니다. 빛의 속도로 수십억년, 수백억년을 가도 아직 우주의 끝이 아니라면 우주가 얼마나 크고 넓은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런 우주와 수많은 별들을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성경의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고 선언합니다. 하늘은 우주 전체를 말합니다. 우주는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광대합니다. 태양은 ‘우리 은하계’의 천억 개나 되는 항성들 중의 하나이며, ‘다른 은하계’에는 수천억 또는 수조 개의 행성들이 있다고 합니다.
영어에 awe라는 말이 있습니다. 너무 놀라서 입이 쩍 벌어진 입술 모양으로 내는 소리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awesome God’ ‘놀라우신 하나님’입니다. 광대한 우주에 비해 우리가 사는 지구는 작은 돌보다도 작으며 우리는 모래알 하나보다 작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지구와 하늘과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은 아주 작은 우리 개개인을 아주 자상하고 세밀하게 돌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도우심으로 살고 있음을 늘 기억하고 감사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2024년 1월 14일 <평안을 누리는 지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불평해서는 안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가 억울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로써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바라보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현실은 받아들이고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Dale Galloway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 능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①받아들인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들과의 싸움을 그만둔다는 의미이다.
②받아들이는 것은 수없는 상처들을 멈추게 할 수 있다.
③받아들이는 것은 당신이 변화시킬 수 없는 일들에 대해 걱정하지 않게 한다.
④받아들이는 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맡기고 그대로 둘 수 있게 한다. 그때 당신은 그대로 남겨두어야 할 것과, 변화시켜야 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내적인 평온함이다.
하나님께 맡길 때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인생은 내가 모든 문제를 다 풀어야 하는 현장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운명에 맡겨야 할만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목사요 신학교 교수였던 Reinhold Niebuhr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은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주시고, 제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은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그리고 제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과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아멘!” (God, grant me th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I cannot change. Th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I can and the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Amen)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없어서 인간적인 생각으로 조급해 하거나 자기의 수단과 방법을 따르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공의를 믿는 가운데 모든 것을 그분의 뜻에 맡김으로 평안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4년 1월 7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Behold, I will do a new thing!’를 금년 우리 교회 표어로 정했습니다. 이사야 43장 19절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이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이 말씀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과 소망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들을 내리라고 하십니다. 우리(내)가 새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한 목적을 가지시고 친히 새 일을 행하십니다.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십니다. 이것은 사람이 생각하기에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광야에는 길이 없습니다. 사막에 강을 낸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과 함께 가면 길이 됩니다.
정호승 시인의 ‘봄길’이라는 시입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 길이 있다 /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 끝없이 걸어 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 사랑이 끝나는 곳에서도 /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 한 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 사람이 있다
봄은 아직 멀지만, 길 되시고 사랑 되시는 우리 주님을 생각하면 우리 마음에는 이미 봄이 온 것 같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과거의 일들을 다 잊어버리고 앞으로 주님께서 행하실 새 일을 바라보며 소망중에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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